보원사 소개

보원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화엄십찰 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1,000여명의 승려가 수행할만큼 큰 사세를 갖고 있다. 조선 중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 관련 기록은 알려진 바 없으나,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에는 보조선사가 가량협산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가량협산 보원사를 서산 보원사로 칭한다면 보원사의 창건연대는 신라 흥덕왕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최치원의『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서도 해동 화엄대찰이 있는 심산에 능주 가야협보원사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보원사지에 남아 있는『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保勝塔碑)』에는 탄문스님이 보원사에 왔고, 이후 교종과 선종 승려 1천여 명이 대사를 영접하러 왔다는 내용이 쓰여져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고려 정종이 아들 4명을 출가시키니, 영통사, 숭법사, 동화사 등과 함께 보원사에 계단을 설치하고 경률을 닦았다고 적혀있다.

조선시대 기록을 살펴보면『신승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보원사가 상왕산에 있다고 하고,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도 보원사 위치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1619년 편찬된『호산록(湖山錄)』에는 강당사의 옛 이름이 보원사라는 내용이 실려있으며, 『호서읍지(湖西邑誌)』에는 강당사에 철불이 1구 있는데, 높이는 7자이며, 대좌 높이는 1자이고 양손을 잃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로 보아 보원사는 창건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늦어도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운영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0세기부터 11세기 경에는 사찰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찰명은 원래 ‘보원사’ 였다가 조선후기 어느 시기에 ‘강당사’로 바뀐 것으로 판단된다.